염치없는 사람
한참 텃밭 일을 하고 있는데 동생이 누군가에게 인사를 한다. 앞집 박여사다.
앞 집 박여사는 무례하고 궁상맞은 시골 사람의 전형 같은 사람이다. 정말 친하고 싶지 않은 부류다.
우리는 동네 사람들과 거의 교류가 없이 지내다 보니 만나면 인사 정도나 할 뿐 말을 섞을 일이 전혀 없다. 시골 생활을 하고 있어도 도시 사람처럼 누가 어디에 사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사실 관심도 없다).
어느 날 텃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앞 집 박여사가 말을 걸어왔다. '농사가 너무 잘되네요, 작물이 너무 잘 자라는 것 같아요' 운운하며. 한창 수확하고 있던 때라 수확물을 좀 드릴까요 했더니 날름 받아가더니 그 뒤로 수확할 때마다 와서 수확물을 챙겨갔다.
동생이 암환자라고 특별한 동정을 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일까?
그 집은 남편이 농사를 짓는데 텃밭 규모는 사실 우리 보다도 더 크다. 근데 툭하면 와서 농사가 잘 안 됐네, 남이 다 따갔네, 남편이 안 심어주네 하면서 우리 농작물을 얻어가는 거였다. 한두 번이면 애교로 봐주지만 우리가 그 사람 주려고 농사짓는 것도 아닌데 매번 와서 아쉬운 소리나 하면서 농작물 얻어가는 꼴이 보기 좋기만 하겠는가?
안 그래도 시선이 곱지 않아 졌는데 급기야는 무 생채 먹고 싶은데 무 하나 뽑아주세요. 겉절이 해 먹고 싶은데 배추 한 포기 뽑아주시면 안 돼요? 하는 도 넘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네도 다 키우면서.
그러면서 자기네 농사 잘됐다고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간혹 고맙다고 주는 것은 다 공산품들 뿐이다. 우리도 사 먹을 수는 있거든요.
초반에는 모종이며 수확물이며 많이도 얻어갔다. 나중에 하는 꼴이 너무 가관이라 우리가 안 주기 시작하니 우리가 텃밭에 있을 때 찾아와서 이것저것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마음씨 좋은 동생은 그래도 안타깝게 여겨서 그 요구를 들어주다가 올봄 아바타 상추 모종을 얻어간 이후로 좀 질려버려서 상종을 안 하게 됐다.
이런 우리의 심정을 본인은 모르니 우리가 텃밭에 있을 땐 무언가 얻어가고 싶어서 자꾸 와서 말을 거는데 올해같이 텃밭일이 넘치도록 힘들 때 일을 자꾸 방해하니 좋은 반응이 나갈 리가 만무하다. 거의 무시하고 우리 할 일만 하는데도 꿋꿋하게 텃밭에 찾아와 아는 척하는 걸 보니 얻어먹기 위해 자존심이고 염치고 다 버렸나 보다.
보통 집 앞 텃밭에서는 늦게까지 일 안 하는데 내일 비도 오고 강풍이 분다고 해서 땅묘로 심은 고추와 단근 삽목한 고추들 지주대 세우고 묶어준다고 지체했더니 어김없이 앞 집 박여사가 텃밭에 나와서 아는 척을 한다. 아~ 피곤하다.
텃밭 가장자리에 서서 한참을 떠들더니 펜스 가까이에 자라고 있는 자생 들깨를 보고는 '나는 깻잎을 좋아하는데 남편이 들깨를 심어주지 않아요. 이거 깻잎 몇 장 따가도 돼요?' 그런다. 그럼 그렇지.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 찾아온 거겠지. 어차피 자생 들깨라 우리가 먹는 것도 아니고 곧 베어버릴 건데 자기가 따 가겠다니 뭐, 그러라고 했더니 열심히 따더니 '오이는 작황이 어때요?'라고 묻는다. 집 앞 텃밭에 오이를 안 심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저렇게 묻는 것은 오이를 달라는 소리인 건데 우리도 모르는 척 '때에 맞게 자라요. 올해는 좀 많이 심어서 탈이지만.' 그러고 만다. 안 그래도 밉상인 저 박여사에게 아무리 우리가 안 먹는 오이라고 할지라도 따다 주긴 싫은 것이다. 한참 남편의 오이 농사 흉을 보더니 이번에는 우리 수확물에 눈을 돌린다. '양배추 수확하셨네요? 나 양배추 먹고 싶은데, 양배추 하나 주면 안 돼요?'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 매번 달라는 소리를 하기는 염치없지 않나? 우리 농사짓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면서 우리 밭에 있는 작물들을 마치 제 작물처럼 가져가서 먹으려고 한다. 진짜 괘씸하다.
보통 내가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텃밭을 지나가는 안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텃밭에 관심을 보이며 인사를 한다. '풀 매십니까?', '물 주느라고 고생이 많네요.', '뭐 심으십니까?' 등등. 근데 저 박여사는 수확할 때가 아니면 보통 텃밭에서 만나도 아는 척도 안 하고 지나간다. 특히 나 혼자 있을 때는 더 그렇다. 저녁에 동생과 같이 있으면서 수확할 때가 박여사가 노리는 때인 것이다.
동생은 양배추를 주고 올라와서는 기분 나빠한다. '수확바구니를 가져갔어야 해, 달라고 할 것 같더라니. 어쩐지 빨리 올라오고 싶었는데' 하면서. '어차피 안 먹는 건데 뭐 어때, 좋은 것도 아니고, 다음에 좋은 건 안 주면 되지.'라고 내가 말했으나 박여사가 얄미운 마음이 쉬이 가시지는 않는 모양이다.
사실 눈에 빤히 보이는 속 보이는 짓을 하는데 이뻐 보일 리가 없다. 그러니 박여사는 본인은 저렇게 자기가 요구해서 받아먹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보통 남들에게 나눠주는 좋은 작물은 절대 얻어먹을 수 없다. 자기 복인 것이다.
그래도 저렇게 얻어가는 것도 꼴 보기 싫으니 앞으로 집 앞 텃밭에서는 새벽에만 수확해야겠다.
나는 가끔 앞 집 박여사의 남편이 불쌍할 때가 있는데 부인이 저렇게 본인 흉을 보고 다니는 것은 알까? 싶어서다. 나는 타인의 노고를 무시하는 언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자기는 농사 지을 줄도 모르면서 남편의 농사법을 폄하하는 박여사나 엄청 부모님 생각하는 척 '농사짓지 말고 그냥 사 먹으세요.'라고 말하는 아랫집 친구 같은 태도 말이다. 심지어 그들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받아먹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정말 인간이 덜 된 거다.
대체적으로 염치없는 인간들은 남들의 수고를 잘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많다.
딱히 앞 집 박여사만 염치없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시골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들 염치가 없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피하고, 시골 사람들과 수확물 나누는 걸 피하고, 시골 사람들과 만나는 걸 피하게 된다.
염치없는 사람을 피하느라 우리의 삶이 피곤해지는 것이 좀 못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