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키우는 고추 모종
우리 집에서 모종을 키우는 것은 전적으로 동생의 일이다. 부끄럽지만 텃밭 일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종자나 파종이나 모종을 키우는 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 모.
우리의 텃밭에 여러 가지 토종 작물을 키우고 남들이 잘 안 키우는 작물들과 각종 허브들이 자라게 된 것도 온전히 동생의 공로다. 호기심 많은 동생의 오지랖 넓은 실험 정신이 아니었다면 이번생에서 맛있는 토종 작물들을 알게 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덕분에 생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던 고추 농사를 짓고 있기도 하지만.
지금도 생각하지만 토종 고추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고추 농사는 안 지었을 것이다. 고추는 병충해가 많아 키우기도 너무 어렵고 어렵사리 키우고 나서도 열매를 따고 말리고 손질해서 보관하다 빻아야 하니 그 과정이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다. 차라리 비싸더라도 사 먹는 것이 훨씬 가성비 높은 일인 것이다.
이전에는 건고추를 '해 담는 집'이라는 곳에서 사 먹었다. 정말 고춧가루가 맛있는 집이었는데 고춧가루를 빻으러 가는 동네 방앗간 사장님도 많은 고추를 빻아봤지만 해 담는 집 건고추만큼 좋은 고추를 본 적이 없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었다. 건고추의 상태도 상태지만 고춧가루의 맛도 상당히 좋아서 김장을 하고 엄청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가 수비초를 키워서 수비초 고춧가루를 맛보고 나니 해 담는 집의 고춧가루는 순식간에 찬밥 취급을 받게 됐다. 수비초 고춧가루가 너무 맛있어서 다른 집 고춧가루에 비해 월등하게 맛있는 해 담는 집 고춧가루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먹으면 맛이 너무 평이하고 밋밋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해서 좋은 것을 맛보고 나면 차선책을 택하기가 싫어진다. 이런 이유로 사연 많은 수비초 농사는 배추와 무에 이어 우리가 매년 꼭 해야 하는 농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제는 수비초가 토종 고추다 보니 아무 모종 가게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모종이 아니라서 손수 모종을 키워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모종 키우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모종을 키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더군다나 겨울에 육묘를 해야 하는 고추 같은 것은 더 힘들다. 모종들은 온도나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아주 세심하게 관리해줘야 한다. 온도와 습도, 일광 조건을 맞추기 위해 전문적인 설비도 필요하다. 그러니 배양토에 심어놓고 싹이 나기만 기다려서 되는 일이 아니다. 특히 고추는 발아 온도가 높기 때문에 집안에서 육묘를 해도 전기방석으로 온도를 높여주어야 한다. 실제 고추 육묘는 꽤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변 농가에서 고추 모종을 직접 키우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작년에 2월부터 고추 모종을 키웠다가 너무 빨리 자라서 낭패를 봤던 까닭에 올해는 3월부터 고추 모종을 키우기로 했다. 동생의 말로는 고추는 발아 온도가 25~30도 정도 라고 했다. 지금 집안의 온도가 20도 정도 되기 때문에 고추를 발아시키려면 전기방석을 틀어놓고 이불을 덮어서 그 안의 온도가 30도가 되도록 유지시켜줘야 한다. 씨앗이 발아가 되면 배양토를 담은 모종 트레이에 하나씩 옮겨 심고 8시간씩 식물등을 켜서 일조량을 맞춰준다. 빛을 잘 쐬 주어야지만 모종이 웃자라지 않는다. 모종을 키우는 동안에는 아침에는 식물등 밑으로 모종을 옮겨주고 저녁에는 차가운 바닥에 모종을 옮겨놓는 일을 반복하곤 한다. 어느 정도 일교차가 생겨야지 모종들이 잘 자란다고 한다. 쳐다만 보고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동생은 고추 육묘도 이제 3년 차라 고추 모종 키우는 솜씨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원래도 모종을 잘 키워서 여기저기 나눠주곤 했지만.
고추 정식 전까지 고추 모종을 키우는 기간은 대략 70~90일 정도가 된다고 한다. 고추의 방아다리에 꽃이 필 때까지 모종을 키우면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지렁이 분변토를 이용해서 그런지 단근 삽목을 해도 대략 60일 정도 키우면 정식할 정도로 자란다. 지금은 5월에 정식할 예정으로 고추 모종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추 모종을 단근 삽목해서 키우는데 이것이 우리가 직접 고추 모종을 키우는 두 번째 이유이다. 고추의 본잎이 나기 시작하면 뿌리를 잘라내고 줄기를 모종 트레이에 심어서 암실에 놔두면 줄기에서 새로운 뿌리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렇게 생긴 뿌리가 더 튼튼하고 잘 뻗기 때문에 이후 고추가 더 잘 자라고 열매도 많이 맺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단근 삽목한 고추와 그냥 키운 고추를 비교해 봤더니 단근 삽목한 고추가 월등하게 더 튼튼하고 더 잘 자랐기 때문에 육묘기간이 좀 길어지더라도 우리는 단근 삽목해서 고추 모종을 키운다.
우리가 키우고 있는 고추 모종들은 이번 주말에 단근 삽목할 예정이다.
현재까지는 고추 모종이 발아도 잘됐고 아주 잘 크고 있다. 같이 키우는 상추 모종도 제법 자라서 주말에 텃밭에 옮겨줄 예정이다.
동생의 블친들 중에는 동생의 글을 읽고 나서 종자를 나눠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올해도 어김없이 수비초 종자를 나눠 달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토종 고추라고 솔깃해서 씨앗을 얻어서 모종을 키우려고 시도했다가 발아도 못 시키고 실패하거나 발아를 시켜도 영양 부족으로 모종을 키우지 못해서 실패하곤 한다. 수비초 종자를 줘서 제대로 모종을 키웠다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보니 이제는 종자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는 눈이 곱지 않다. 키우질 못하면 시도도 하지 말 것이지 애꿎은 토종 종자들만 낭비하고 있네, 쯧.
사실 우리야 작물 키우는 것이 전문적인 일은 아니라 장비나 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되는대로 얼렁뚱땅 농사를 짓고 있긴 하지만 그런 우리라도 모종이 웃자라지 못하게 켜주는 식물등이 있고 모종을 키우는 트레이도 있으며 발아 온도를 맞추기 위한 전기방석도 있다. 모종을 키우기 위한 최소한의 장비인 셈이다. 곰곰이 따져보니 농사를 짓는 데는 소소하게 꽤 돈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