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텃밭 이야기

고급지게 버리기

nar(kai) 2025. 3. 2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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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아를 버린 곳에서 난 단영마늘과 홍산마늘

 
지렁이 분변토는 토양의 구조가 매우 훌륭해서 배수가 무척 잘된다. 거기에다 땅 속에 유기물과 미생물이 많아서 그런지 외부 기온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땅이 잘 얼지 않는다는 소리다.
우리는 식물들의 잔사나 못 먹은 수확물들을 텃밭에 버려두곤 하는데 운이 나쁘면 잔사에서 떨어진 종자나 버린 수확물에서 싹이 나서 자생 작물로 자라곤 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작물들이 여기저기서 자라게 되는 것이다.
 
감자 같은 경우에 워낙 안 먹기도 하고 제대로 수확하지 않기도 해서 수시로 자라는 이삭 감자와 못 먹고 싹이 난 감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곤 했는데 퇴비통에 버려둔 감자가 싹이 나고 자라서 수확이 되는 걸 본 이후 못 먹게 된 감자는 텃밭에 자리를 엄선해서 깊이 묻어두곤 했는데 동생과 나는 이렇게 텃밭에 묻어 두는 것을 '고급지게 버리기'라고 부른다.
고급지게 버리기의 시작은 당연히 감자였다. 감자를 수확하다 보면 햇빛을 받아 파랗게 된 감자도 있고 싹 난 감자도 있고 벌레가 먹었거나 모양이 이상한 감자도 있는데 이런 감자들은 옮기는 것도 일이니 텃밭 한편에 자리를 마련하여 깊숙이 묻어 놓았다. 썩으면 어차피 거름이 될 테니까 이런 안이한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묻어놓은 감자들은 대부분이 때가 되면 싹이 나서 자라고 결실한다. 묻어놓은 것 외에도 미처 캐내지 못한 이삭 감자들도 자라곤 하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 텃밭에서는 수시로 이곳저곳에서 감자들이 자란다. 예전에 갑임 아주머니는 우리 텃밭에서 수시로 자라는 자생 감자들을 보고 '너희는 굶어 죽지는 않겠다'며 부러워하셨더랬다.
 
감자 이후 우리는 처리가 곤란한 남은 종자들과 상태가 좋지 못한 수확물들도 '고급지게 버리기' 시작했는데 포기 나눔 한 부추 종근, 쪽파 종구, 마늘 주아나 생강, 강황 같은 것들을 한쪽에 모아 버리고 흙을 덮어 놓는 것이다. 

고급지게 버린 홍산마늘이 자란 모습

 
지렁이 분변토로 된 우리 텃밭에 묻어 놓은 종자나 작물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잘 보존되어 있다가 때가 되면 싹이 나서 자생 작물로 자란다. 아주까리에서 떨어진 종자는 2년 차인 작년까지 썩지도 않고 싹이 났었다. 올해도 또 날지 모르겠다. 고급지게 버린 감자의 경우도 장마 기간을 지나거나 한 겨울의 한파를 그대로 겪었어도 썩거나 얼지 않고 때가 되면 멀쩡하게 싹을 내놓곤 한다. 이런 지렁이 분변토의 성능 때문에 우리는 작물을 심는 시기를 민감하게 조정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심어 놓는 경향이 있는데 때에 맞지 않게 파종한 종자는 몇 개월에서 일 년 넘게까지도 땅 속에 그대로 있다가 때가 되면(발아하기 적당한 환경이 되면) 싹을 내놓는다.
고급지게 버린 작물들도 마찬가지로 때가 되면 싹이 나서 자라는데 어떤 작물은 자생 작물처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서 때에 맞춰 심은 작물들보다도 더 잘 자랄 때도 있다.

고급지게 버린 쪽파 종구가 싹이 났다

 
작년에는 보관했던 쪽파 종구가 너무 많아서 여러 차례 심고도 남은 종구를 다 함께 묻어 버렸는데 그렇게 묻어버린 자리에서 쪽파가 자랐는데 키우려고 심었던 쪽파보다 더 크고 튼튼하게 자랐다(겨울 가뭄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마늘 주아를 버린 곳에서 자란 마늘도 너무 빽빽하게 자라긴 하지만 기대를 벗어나 꽤 잘 자라고 있다.

고급지게 버린 두백감자와 홍감자

 
먹지 못해서 싹이 나고 쭈그러진 감자와 생강 구강, 못 먹은 강황도 고급지게  버려놨다. 물론 종자로 쓸 것은 따로 있으니 고급지게 버린 것들이 제대로 싹이 난다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작물을 심게 되는 것이다. 수확량이 많아져서 '○○지옥'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고급지게 버린 감자에서 싹이 났다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생강과 강황은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다. 생강과 강황은 흙속에 묻어 두면 잘 썩어버리기 때문에 종자를 보관하는 게 쉽지 않은데 11월에 묻어둔 생강과 강황이 멀쩡하게 싹이 난다면 종자 보관을 위해 애를 쓸 필요 없이 종자용 생강을 땅 속에 깊숙이 묻어 놓으면 되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물론 종자용 생강과 강황을 상토에 잘 보관하고 있긴 하지만.
매우 낙관적으로 보고 있긴 하지만 생강 구강과 강황이 고급지게 버린 데서 제대로 싹이 올라온다면 감자의 뒤를 이어 고급지게 버리기를 적극 활용하는 작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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