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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시골생활 이야기

청호박을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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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본 호박밭 모습

 

텃밭에서 호박잎을 따고 있으니 우리 텃밭 뒤쪽에 위치한 나무 농원에서 일하는 팀장님이 와서 아는 척을 하며 '올해 호박은 많이 달렸습니까?' 하고 묻는다. 올해는 유난히 우리 호박의 작황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물론 호박을 얻고 싶어서 그런 것일 테다.
사실 호박은 달리긴 많이 달렸다. 덩굴이 너무 무성해서 따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문제긴 해도(시간 내서 덩굴을 뒤져야 한다).

올해는 주변에서 호박 농사가 망했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는데 봄부터 가물어서 호박 열매가 없다고 난리였기도 했지만 착과 된 열매도 연이은 폭염에 상하고 가뭄에 줄기가 말라서 제대로 크지 못하고 누렇게 된 것이 많아서 수확해 놓은 호박들의 모양이 다들 형편없다.
주변 상황과 다르게 올해 우리 호박은 아주 좋다. 가물어서 그런지 예년보다 분도 훨씬 많이 폈고, 열심히 받침대로 받쳐줘서 호박 모양도 이쁘다. 열매가 일찍부터 달려서 이미 익은 호박도 다수고 열매도 꽤 많이 달렸다. 호박덩굴의 세력도 너무 좋아서 벌써 여러 군데에서 호박이 텃밭을 벗어나 뻗어가고 있다. 호박밭의 호박 줄기가 너무 무성하게 뻗어있다 보니 호박들이 다 호박잎에 가려져서 호박이 달려 있는지 외부에서 보이지 않지만 덕분에 호박은 더위에 상하지도 않고 호박잎 그늘 안에서 착실히 익어가고 있다. 

 

우리는 청호박을 심는데 이곳에서는 심는 사람이 드문 호박이다 보니 처음 이 호박을 접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낯선 호박 색깔에 거부감부터 가지고 호박이 제대로 익은 게 맞는지를 누차 확인한다. 갑임 아주머니와 덕곡댁 아주머니도 처음에는 호박이 이상하다고 안 받으려고 했었다.

작년에는 수확한 호박이 많아도 너무 많았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호박을 나눔 했었는데(지인들은 물론이고 동네 회관, 주변 식당에도 나눠줬다) 그렇게 우리 호박 맛을 본 사람들이 올해에도 호박을 얻고 싶어서 텃밭에 있는 내게 호박이 있는지 물어오곤 한다.

텃밭 옆 역에 근무하는 언니에게 나눔한 호박

 
팥을 따면서 호박덩굴을 들춰보니 분이 하얗게 핀 잘 익은 호박이 보인다. 호박 꼭지가 노랗게 마른 것을 보니 수확해야겠다. 막상 수확하려고 했더니 크기가 꽤 크다. 7~8kg은 넘을 것 같다. 이렇게 큰 호박은 택배 보낼 수도 없고 우리가 가져가봐야 당장에 먹을 것도 아니니 마침 텃밭을 지나가는 텃밭 옆 철도역에 근무하는 언니에게 가지와 함께 나눔 해 줬다.

 

사실 호박은 늘 많이 열리고 우리는 잘 안 먹는 작물이라 이래저래 자주 나눔 하긴 하는데 따져보면 나눔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작물이기도 하다. 텃밭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호박을 심지만 잘 익은 호박은 의외로 구하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잘 익은 호박은 꽤 많은 사람들이 탐을 낸다. 그래서 우리같이 섣불리 호박을 나눔 했다가는 계속 호박을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아랫집 아주머니의 이야기로는 청호박이 일반호박보다 살도 많고 달아서 호박죽 끓여 먹거나 전을 부쳐 먹으면 너무 맛있단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작년에 우리에게 늙은 호박을 얻어먹었던 사람들은 올해도 당연하게 늙은 호박을 얻고 싶어 한다. 갑임 아주머니와 덕곡댁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늙은 호박을 달라고 말을 해놨었기 때문에 일찍이 잘 익은 호박을 따서 하나씩 갖다 드렸는데 그 이후로도 호박을 더 달라고 계속 호박 근황을 물어본다. 너무 일찍 준 게 화근이다.

점순 아주머니와 아랫집 아주머니는 조금 더 점잖은 사람들이라 대놓고 요구하지는 않아도 우리 호박은 맛있으니까 주면 고맙지 하며 은근히 줄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호박을 수확하면 줄 것이 뻔하니까. 그런데 올해는 다들 호박 작황이 나쁘다고 하니까 이전에 만났을 때 넌지시 '너희 호박은 어떻냐?'라고 물어보셨다. '작년에는 엄청 많이 수확했었잖아'하시면서. 이것은 호박을 얻고 싶다는 심정의 다른 표현이다. 걱정하지 마셔요. 올해도 호박은 많으니까.

나무 농원의 팀장님같이 자주 못 만나는 사람들은 텃밭에서 마주쳤을 때 부탁을 한다. 호박을 수확하면 좀 달라고.

물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수확할 호박이 있지만 아직은 다른 텃밭 일이 바쁜 관계로 호박 따위에 시간을 쏟지 않는다. 마늘을 심고 나면 슬슬 호박 수확을 해 볼까 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호박죽을 먹지 않아서 사람들이 호박죽 끓여 먹을 늙은 호박에 열광하는 심정을 잘 모르겠다. 다들 우리보다 큰 텃밭을 가지고 있으니 좋아하면 직접 키워 먹어도 될 텐데 때가 되면 청호박을 얻기 위해 우리 텃밭을 기웃거린다. 물론 갑임 아주머니와 아랫집 아주머니처럼 (우리에게 모종을 얻어서) 청호박을 심었는데 농사가 잘 안 된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청호박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호박은 하얗게 분을 피우며 잘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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