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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텃밭 이야기

다품종 소량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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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평 길바닥 텃밭-녹비식물을 제외한 9개 품목이 심겨져 있다.

원래 내가 텃밭을 가꾸는 이유는 지렁이 분변토에서 키운 것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몇 가지 채소 즉 상추, 부추, 대파, 열무 때문이었다. 상추나 열무는 없으면 안 먹어도 무관한 채소이니 텃밭을 가꾸는 대부분의 이유가 부추와 대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 먹을 순 없으나 내가 좋아하는 채소들이라 안 먹을 수도 없어서 무조건 키워 먹어야 한다.  텃밭이 여유가 있으면 청양 고추와 깻잎 정도를 더 키울 뿐이지 텃밭을 더 확장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텃밭이 로망인 동생이 텃밭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우리의 텃밭 상황은 좀 달라졌다.  호기심이 많은 만큼 심어보고 싶은 작물이 많아서 이것 조금 저것 조금 심다 보니 자그마한 텃밭에 심어놓은 품종이 꽤나 여러 가지가 되었다. 원래도 텃밭은 다품종 소량생산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게 적합하다고 한다. 대량으로 심어봐야 팔 것도 아니니 자기 먹을 만큼 이것저것 심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생의 목적도 다품종 소량생산이었다. 우리가 먹는 양이 적기도 하고 입맛 까다로운 동생은 같은 음식을 연거푸 먹는 것을 워낙 싫어하는지라 채소도 이것저것 다양하게 심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닐 줄은.

 

텃밭에는 우리가 즐겨 먹는 채소와 동생이 키워보고 싶은 채소,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채소로 채워졌다-동생의 호기심은 낯선 채소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조건 한번  키워보게 했다-  작물의 품종이 다양해지니 재배방법도 제각각이라 물 주는 주기, 성장 속도, 수확주기도 다양해졌다. 한마디로 텃밭에서 해야 할 일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텃밭에 일이 많아지니 주객이 전도되기 시작했다. 재배가 익숙해진 즐겨 먹는 채소 키우는 건 뒷전이 되고 재배가 낯선 새로이 키우는 작물을 더 신경을 쓰게 됐다. 새로운 작물들을 먹어보느라 좋아하는 작물들을 못 먹게 됐다. 게다가 지렁이 분변토 베이스의 우리 텃밭은 생산성이 다른 텃밭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의도하지 않게 다품종 대량생산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수확 시기만 되면 수확물 처리 방법을 모색하느라 골치가 아파진다.

 

작년만 해도 예상보다 많은 생산량 때문에 처리에 골머리를 앓게 한 몇몇 '지옥'들이 있었다. '상추지옥', '감자지옥', '오이지옥', '호박지옥'. 잘 안 먹는 채소인데 많이 수확되면 대략 난감하다. 오이, 감자, 호박, 동부콩 같은 것들. 의도하지 않은 다품종 대량생산의 수혜자는 주변 사람들이 되었다. 잉여 생산물을 나눠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품목의 수확물을 얻어가는 사람들은 신이 났다. - 우리 텃밭에는 이곳 사람들이 키우지 않는 채소(아스파라거스, 각종 허브류)도 많아서 우리 텃밭에서만 얻을 수 있는 품목이 꽤 된다-

 

나눔 이후로 괜히 친한척하면서 또 얻어갈 건 없나 호시탐탐 우리 수확물을 노리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텃밭에서 일하고 있으면 아는 척 와서 말 걸고 이것 좀 주세요 저것 좀 주세요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동생의 인터넷 카페 회원들도 우리 텃밭 채소의 맛을 보고 이것 보내주세요 저것 보내주세요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원래 시골 사람들과 거의 왕래가 없던 평온한 우리의 삶이 급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동생은 최근에 토종 작물들에 관심이 많아져서 토종 종자 나눔 받는 것에 열심이다. 텃밭의 규모는 한정이 되어 있으니 기존 작물에 나눔 받은 토종 종자까지 심다 보면 심는 장소가 부족해서  '이건  어디다 심어야 되지?'를 매번 고민하게 된다. 빈자리 구석구석에 심다 보니 어느새 아주 정신없는 텃밭이 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다품종 대량 생산에 질린 동생과 나는 올해는 정말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자고 결의했다. 줄일 수 있으면 가짓수도 줄여야 되지만 한 품종당 심는 개수를 대거 줄이기로 했다. 소량 생산을 목적으로. 감자는 나누지도 않고 통으로 심었는데 뜻하지 않은 이삭 감자들이 자생해서 올해도 지옥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올해부터 수확하는 아스파라거스는 이미 처치곤란이 되었다. 상추와 부지깽이나물, 삼잎국화도 벌써 여러 명에게 나눔을 했다. 세상 일이 마음처럼 쉽지 않다지만, 비만 오면 쑥쑥 크는 작물들 때문에 동생은 눈치 없는 풀떼기라며 애먼 작물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예전에 정말 손바닥 만한 텃밭만 있었을 때는 작물 자라기만 기대하며 온 신경을 작물에다 쏟았었는데 이제는 잘 자라는 작물을 타박하다니 사람 마음이 간사하기 짝이 없다.

 

시골 사람들의 염치없음에 질릴 대로 질려서 올해는 나눔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날이 빨리 따뜻해지고 비도 자주 와주니 작물의 대량 생산을 막을 길이 없다. 뒤돌아서면 텃밭에서 수확할 것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또 나눠줄 사람을 찾아봐야겠구나.

 

우리는 언제쯤 다품종 소량생산을 할 수 있을까? 다품종 소량생산의 길이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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