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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텃밭 이야기

수확 매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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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수확되는 수확물

7월부터 본격적으로 작물들을 수확하는 시기가 도래하는데, 4월에 심었던 작물들 고추, 오이, 참외, 가지, 옥수수, 방울토마토등의 열매들이 익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매일 수확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다양한 품종을 심은 만큼 다양한 작물들이 매일 수확된다. 날이 더워져서 일하기가 싫어지니 오매불망 수확을 기다렸던 마음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수확물이 많은 것에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눈치 없는 것들이라며 애먼 수확물을 탓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올해는 날씨가 좋지 않아서 농작물들의 작황이 좋지 않다. 우리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겠지만 봄에 완두콩 농사가 망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호박이나 오이가 열매가 없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동부콩도 날이 가물고 너무 더워서 열매가 잘 열리지 않는다고 하고, 고추 외에는 농사가 잘됐다고 이야기 들려오는 게 없는 상황이니 그나마 수확물이 매일 나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만 우리가 처리할 수 없을 만큼 수확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것도 꽤나 골치 아픈 일이 된다.

잘 먹지 않는 오이나 가지, 호박 같은 수확물은 텃밭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열심히 나눠주지만 그러고도 남는 것이 많아 냉장고에 고스란히 쌓이고 있다. 올해는 나름  수확물을 소진해 보려고 즐겨 먹지 않았던 가지전, 오이 초무침, 녹두 빈대떡, 야채 전, 꽈리무침, 야채볶음등 갖은 야채를 사용하는 음식을 많이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냉장고에는 여전히 처리해야 할 수확물이 빼곡히 들어있다.

특히나 올해는 수박과 참외 같은 과일이 풍년이라 냉장고에 먹어야 할 과일들도 많은데, 과일 선물도 너무 많이 들어와서 야채에 이어 과일까지 처지곤란이다. 오죽했으면 과일 좋아하는 동생이  과일 나눔을 했을까.

동생이 하루에 세끼를 먹어도 수확물을 다 소진을 못할 판이라며 투덜거리는데, 사실 날도 덥고 입맛도 없어 음식 해먹기도 싫은 요즘인데 매일 나오는 수확물 처리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음식을 해 먹는 것도 참 못할 짓이다.

수확할 것이 많아지면 당연히 수확에 들이는 시간도 많아진다. 아침저녁으로 수확하고, 수확해 와서는 수확물을 씻고 다듬어서 정리해야 하니 텃밭에 들이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만큼이나 많이 소요된다. 이쯤 되면 수확에 지쳐 텃밭일을 등한시할 수밖에. 방치하는 작물들이 늘어나고 수확을 미루는 작물도 늘어나고 빨리 텃밭에서 퇴출시키는 작물도 늘어난다.

주변 사람들이 멀쩡한 작물들을 퇴출시키는 걸 보면 아깝다고 난리지만 텃밭에 온종일 매여있지 않으려면 아까운 게 대수겠는가? 어차피 다 먹을 수도 없는 건데.

고추를 제외하고 모든 작물이 다 방치되고 있다. 그렇다고 고추도 특별히 관리하는 것은 아니고 아주 가끔 물만 줄 뿐이니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부추와 고구마순, 깻잎, 오이, 꽈리고추나 청양고추 같은 것은 아예 수확을 포기했다. 그래도 7월에는 호박잎을 좋아하는 지인들 때문에 여러 가지 야채를 수확해서 호박잎과 함께 꾸러미로 택배를 보냈는데 지금은 그것도 귀찮아서 못하겠다.

갑임 아주머니가 일찌감치 예약해 놓은 늙은 호박도 얼른 따서 갖다 줘버렸다. 나중에 귀찮게 할까 봐 빨리 주고 끝내는 거다. 사실 수확물 나눔 하는 것도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일부러 수확도 해야 하고 다듬기도 해야 되고 배달도 해야 되고, 얻어먹는 거라도 요구 사항들이 많기 때문에 그냥 텃밭에 버리는 게 가장 속편 하다. 방울토마토와 녹두는 퇴출시켰다. 역시나 멀쩡한 열매가 많이 달려 있어서 사람들이 아깝다고 하지만 수확하기도 싫고 수확해 놔도 잘 안 먹으니 배추 심을 자리를 확보해야겠다며 동생이 일시에 정리했다.

 

물론 아직도 오이, 참외, 동부콩, 옥수수, 풋호박 같은 작물이 꾸준히 나오고 참깨도 수확 중이다. 오이 수확을 포기한 덕에 노각만 늘어나서 조만간 노각 잔치를 벌여야 될 판이다. 수확이 지겨워서 동생은 녹두에 이어 검정동부콩도 퇴출시키자고 하고 있긴 한데 퇴출도 시간이 나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수확이 귀찮아지니 수확물을 쳐다보는 시선도 곱지 않아서 꽤 많은 작물들이 퇴비장에 버려진다. 집에서 요리해 먹지 않겠다는 의지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이럴 거 왜 농사를 짓지?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데, 이렇듯 수확에 진저리 치면서도 가을에 김장 채소 심을 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참 학습 경험이 없는 어리석은 농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