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면 감당 못하게 쏟아지는 풋호박 처리를 고심해야 한다(호박의 어린 과실을 애호박이라고 하는데 길쭉한 애호박과 구분하기 위하여 우리는 풋호박이라고 부른다). 작년에는 주변 식당이라는 식당에는 모두 한 번씩 풋호박을 나눠줬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호박을 더 적게 심은 데다 나름 척박한 곳을 골라 심었는데 우리의 기대를 벗어나 호박이 너무 잘 자란 데다 열매도 너무 많다. 호박을 안 먹는 우리로서는 이런 호박 풍년이 살짝 난감하다.
호박이 늙은 호박으로 숙성되는 기간이 착과 후 50~ 60일이라고 한다. 고로 지금 열리는 호박들은 늙은 호박으로 만들 수가 없으니 풋호박일 때 빨리 소진해야 한다.
날씨가 선선해지면 호박들은 새로운 순들이 무섭게 뻗기 시작하고 덩달아 풋호박도 많이 달리게 된다. 매일 열개가 넘는 풋호박을 수확하게 되면 집집마다 나눠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우리가 심은 청호박은 풋호박도 맛있다. 맛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다들 보고 '이건 맛있는 호박이네'라고 말한다. 워낙 청호박이 맛있는 호박이기도 한데 우리는 지렁이 분변토에서 키우기도 하니 우리 호박 맛을 본 사람들은 다들 우리 호박을 탐낸다. 작년에 여기저기 호박을 나눔 한 여파로 올해 우리에게 호박을 달라고 오는 사람들에게 꽤 시달렸고, 텃밭 일이 너무 바빠서 호박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올해는 가급적 호박을 나눔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하루에 열개, 스무 개 수확되는 풋호박 때문에 다시금 호박 나눔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저께 수확한 풋호박과 가지는 텃밭에서 돌아오는 중에 만난 아래층 아주머니에게 모두 드렸다. 아래층 아주머니는 이곳에 친구들이 많으니 친구들과 나눠 먹으면 된다고 우리가 못 먹는 수확물들은 부담 없이 내려다 놓으라고 하셨는데 사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도 꽤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지라 되도록이면 받으실지 물어보고 드리는 편이다. 요즘 호박이 귀해서 그런지 풋호박을 받고 너무 좋아하신다. 잠시 후에 고구마를 쪄서 우리 집에 올라오셔서 '너희는 호박에 무슨 거름을 하냐?'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신다. 아, 우리는 따로 거름도 안 하고 이번에 호박은 그나마 제일 지렁이 분변토 없는 곳을 골라 심은 거라고 하면 믿으시려나?
아래층 아주머니의 말씀으론 같은 작물을 심었어도 우리가 주는 작물들은 윤이 반짝반짝하고 모양이 예뻐서 보기에도 먹음직스럽고 실제로 맛도 너무 좋다고 한다. 올해는 주변 사람들이 다들 호박이 안 열린다고 난리였는데 우리는 호박이 왜 그렇게 많이 열리고 열매가 좋냐며 어떻게 키우는지 사뭇 궁금해하신다. 근데 우리는 정말 호박과 수세미는 신경 안 쓰고 방치해 두는 거라서 키우는 거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지경이라 뭐라고 대답해 줄 말이 없는 게 사실이다.
어제 수확한 풋호박은 텃밭 옆 철도역 다리 밑에서 놀고 계시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나눔 해드렸다. 나눠주러 간 동생이 말하기를 모양이 이쁘고 크기가 균일한 것에 아주머니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풋호박이 너무 좋아서 팔아도 되겠다고 했다면서 돈은 안 주고(돈을 받겠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얻어가는 주제에 서너 개 더 가지고 오라고 했단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때때로 시골 사람들은 너무 염치가 없다.
호박 덩굴을 헤치고 찾으면 풋호박이 더 많을 거지만 애써 찾지 않기로 했다. 보이면 모양이 예뻐서 수확하고 싶을 텐데 수확해 봐야 어차피 처리가 곤란하니 호박에 시간을 쏟지 않으련다. 어제 풋호박을 19개 수확했는데 오늘은 작정하고 수확하면 그보다 더 많이 수확하겠지만 택배 보낼 것 8개만 수확하고 나머지는 크든 말든 눈을 감기로 했다. 자꾸 나눠줘서 우리를 풋호박 인출기쯤으로 생각하는 시골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불쾌하고 맛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 작물을 주는 것은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라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
새벽에 수확하고 들어오다가 출근하는 아랫집 아주머니와 마주쳤는데 새벽부터 텃밭에 나갔다 오는 우리를 걱정하시며 풋호박이 너무 맛있더라고 인사를 한다. 우리 텃밭에 많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우리가 수확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서리 내리기 전까지는 계속 새로운 풋호박이 달릴 테니 언제든 수확하려면 수확할만한 풋호박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가을이 되면 풋호박과 호박잎이 맛있어지는 시기라는데 우리에게는 열리는 풋호박의 개수만큼 근심이 늘어나는 시기다.